Beth Eunhee Hong

writer, teacher, human.


마술사 – 1부

원본: The Magician – Part 1

상실의 해였다. 먼저 아버지를 잃고, 그다음에는 직장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잃었다. 해고와 아버지의 죽음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버려진 건물의 옥상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며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처음 그녀를 보았다 ― 마술사였다.

3월 초의 어느 아침, 나는 옥상에서 평소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언쟁을 벌이는 커플을 망원경으로 훔쳐보고 있었다. 여자가 소리만 지르고 난리를 피우고 있을 뿐, 몸싸움 같은 건 없어서 조금 지루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밖을 스쳐 가는 밝은 빨강이 보였다. 목에 감긴 스카프였다. 키가 크고 날렵한 여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입고 있었다. 짧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는 너무 하얘서 마치 헬멧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길모퉁이 지하철역으로 서둘러 들어가는 것을 망원경으로 따라갔다. 유모차를 미는 전업주부들이나, 늦은 아침을 천천히 걷는 노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걸음걸이였다. 이 동네에서 그녀를 본 건 처음이었다. 누구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조심스럽게 공책에 시간과 날짜를 적었다. 오전 8시 22분, 일요일.

그녀를 다시 본 건 며칠 뒤였다. 나는 그다음 일요일, 지하철역 안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무리일 수도 있었지만,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그녀는 나의 집착이 되었다. 나는 원래 약간 강박적인 성향이 있다. 상황이 나쁜 날엔 부모님이 나를 다툼에 끌어들였고, 내 성격 결함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겼다. 보통 결말은, 어머니가 무딘 칼을 쥔 채 아버지의 등 뒤를 향하고, 그녀의 팔과 다리에 멍이 봄꽃처럼 번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평소처럼 단호한 걸음으로 지나치는 것을 거의 놓칠 뻔했다. 나는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마시고 그녀를 따라 지하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약 3미터쯤 떨어져 서서, 열차가 도착하면 같은 칸에 탈 수 있도록 위치를 잡았다. 그녀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책을 읽으며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가고, 입술을 아주 살짝 움직이며 단어를 되뇌고 있었다.

열차가 도착했다. 칸은 절반 정도만 차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책에 몰두해 있었다. 얇은 두께로 보아 단편집 같았다. 제목을 읽으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음과 관련된 뭔가였다. 저자의 이름은 외국식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머리 색깔 때문에 대략 쉰 살쯤으로 보였지만, 검은 머리로 상상하면 열 살은 더 젊어 보일 수도 있었다. 얼굴은 매끄럽고 주름이 없었으며,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았다. 마치 단순하지만 우아한 자기(磁器) 같았다. 옷차림은 지난번과 거의 똑같았다 ― 검은색 트렌치코트, 검은색 청바지, 검은색 전투화. 스카프가 지난번과는 미묘하게 다른 빨강이었고, 이번에는 은은한 아가일 무늬가 보였다.

정계역에서 그녀가 일어나 검은 가죽 메신저백을 고쳐 멨다. 가방이 꽤 커서 안에 책이 다섯 권은 더 들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차문의 반대편에 서서 휴대폰을 확인하는 척했다.

그녀는 역 근처의 병원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그냥 돌아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따라온 뒤였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보는 척하며 남자 간호사 뒤에 섰다. 엘리베이터가 오는 데 몇 분이 걸렸다. 그녀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간호사의 어깨 너머로 제목을 읽을 수 있었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외 단편집』. 그녀는 이미 4분의 3쯤 읽은 상태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우리를 포함해 여덟 명이 함께 탔다. 그녀는 15층 버튼을 눌렀다. 나는 슬쩍 층 안내판을 보았다. 15층: 호스피스. 15층에서 내린 건 그녀와 나뿐이었다. 땀, 소변, 대변 냄새를 강한 소독약이 간신히 덮고 있는 듯한 냄새에 갑자기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나는 그녀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의 스카프 끝이 복도 맨 끝 방으로 사라지는 걸 보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뒤를 확인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살짝 방 안을 들여다봤다. 그녀는 등 뒤로 앉아 있었고, 침대 위에는 노파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완전히 말라붙고 피부는 거의 반투명했다. 그녀는 노파의 손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막 돌아서려던 순간, 여자가 말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나는 얼어붙었다. 문 정면에 창문이 있어서, 그녀가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본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문 옆 벽에 등을 붙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달아나도 금세 붙잡힐 것이다. 관자놀이에서 낮은 굉음이 울렸다.

“지하철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거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문가에 서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문간으로 나서서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는 두 팔을 가로질러 안은 채 몇 걸음 떨어져 서 있었다.

“죄송해요. 예전에 알던 사람 같아서요.” 나는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그럼 왜 아까, 지하철에서는 아무 말도 안 했죠?”
“만약 다른 사람이면 창피했을 것 같아서요.”
“지금이 더 창피하겠네요.”

그녀의 시선이 내 안을 꿰뚫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예요?” 그녀가 물었다.

“소… 소연이에요.”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의 거침없는 호기심이 수년간의 말더듬 치료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소연이라는 사람은 모르겠는데.” 그녀가 말했다가 잠시 멈췄다. “내 이름은 진이에요.”

그때 침대에 누운 노파가 몸을 움직였다. “누구야?”
“모르는 사람이에요, 엄마.” 그녀는 아이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제 쉬세요.”
노파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 진과 나는 마치 갓난아기를 지켜보는 부모처럼 경건한 침묵 속에서 노파가 잠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진이 속삭이듯 침묵을 깼다.

“우리, 커피 한 잔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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